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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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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리 만세광장

  • 위치상일동 511 (게내수변공원3호 내)
  • 규모공원면적 1,171.7㎡ (약 354평)
  • 의의3·1운동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옛 상일리 헌병주재소(現 농협, 상일동 259 일대)]를 기념 및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공간
  • 시설현황근현대 독립운동사를 담은 기념벽, 상징조형물, 역사해설안내판 등
상일리 만세광장 플레이스 상일리 만세광장 기념벽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이 시각에 탑골공원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3월 10일을 전후해 전국의 도시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27일에는 광주군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의 농민 1000여 명이 상일리에 집결해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맹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일본 헌병들은 총검으로 과격하게 대응했다. 시위대는 헌병주재소 주변 높은 지대에 운집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헌병들은 일제히 총을 무차별로 난사했다. 이때 서부면 감북리에 사는 안종현(56세)과 감이리에 사는 최천성(23세)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또 2명이 부상을 당했다. 구천면 상일리에 사는 김경배(金慶培 32세)는 맨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헌병주재소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입을 크게 벌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순간 일본 헌병이 총구를 입에 넣고 발사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을까! 김경배는 죽지 않고 크게 부상을 당하여 실려 나왔다.

그 후 총상으로 험상궂은 김경배를 ‘만세참봉(萬歲參奉)’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1948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3․1절만 되면 당시 구천국민학교(현 상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상일리 3․1만세시위운동을 생생하게 증언 연설하였다. <‘강동구지’ 강동의 역사와 문화 中 발췌>

찾아오시는 길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 5번출구 도보 20분(1.4km)
5호선 강일역 4번출구 도보 20분(1.4km)
버스 341, 370, 3321(강동첨단업무단지, 상일여고입구에서 하차)
341, 370, 6200, 광주13, 13-2, 16, 1113-1, 1113-2, 1113-10, 1113-11, 하남6-1, 30, 30-3, 38, 87, 89, 112-5, 남양주1-4, 23, 112-1, 용인1113(상일초등학교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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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부서 : 문화예술과 문화관광팀 TEL : 02-3425-5250 수정일 : 2024-03-13